▲ 이주옥(수필가)

[검경일보 특별기고/ 이주옥(수필가)] “오메, 오메 오진 거!”

비가 많이 내리는 아침이면 빗소리만큼이나 우렁우렁 한 어머니 목소리가 아침잠을 설치게 했다. 빗물은 벌써 대야 가득 넘쳐났다. 내리는 비가 등을 흠뻑 적셔도 아랑곳 않은 채 연신 빗물을 끼얹어 팔뚝을 쓸어내리고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 시멘트 마당의 흙을 씻어 내렸다. 빗물이 가득 찬 고무 대야를 바라보며 포만감에 가득 찬 사람처럼 여유롭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한참을 행복해했다.

집엔 커다란 자주색 고무 대야가 기본 3개는 됐다.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그것도 모자라 자그마한 양은 대야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빗물받이에 총동원됐다. 마를 걱정은 접어두고 빨랫감을 일부러 찾고 걸레를 빨고 헹구고 또 헹궜다. 빗물에 빤 옷은 유난히 깨끗하다며 아버지의 하얀 속옷을 펼쳐 보이고는 했다.

지금이야 시골집에 두 분만 사시니 100여 포기 가까운 배추를 절일 일도 없고 마당 있는 한옥을 세 내주고 아파트로 이사를 하셨으니 빗물 받을 일은 더더욱 없다. 거기에 아무리 펑펑 틀어 써도 수도요금 걱정될 만큼 식구도 많지 않다. 그러니 고무대야는 뒤 베란다에 삼층으로 쟁여져 묵묵히 어머니의 세월을 받치며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직도 비가 오면 어머니는 하수구로 빠져 들어가는 빗물을 하염없이 쳐다보며 아깝다고 중얼거린다.

1년에 한 두 차례 다니러 가는 친정. 어머니의 냉장고는 언제나 빈 틈 없이 가득 채워져 있다. 한 숟가락 정도 남은 밥은 물론, 한 젓가락도 안 되는 나물, 잔칫집에서 가져온 돼지편육 한 점도 냉기에 마르고 있다. 매번 제발 과감하게 버리라는 딸들의 타박을 들으면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빈 소주병이나 페트병도 뒤 베란다에 쌓여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딸들은 버리고 어머니는 다시 주워다 놓는 릴레이의 연속이다. 딸들 중 누군가 한 번이라도 다녀가면 없어진 것들의 출처를 묻는 어머니의 애타는 전화가 한동안 계속된다.

어머니는 어지간한 큰 부피가 아니면 아직도 손빨래를 한다. 양말 몇 켤레, 가벼운 속 옷 정도는 샤워하는 중에 빤다. 몇 개 되지 않는 빨래, 몇 바가지 물이면 충분할 것을 세탁기는 물 잡아먹는 하마 같아 마땅치 않은 것이다.

친정은 시골이지만 아파트라 세면실도 도시와 똑같다. 하지만 샤워기가 달린 수도꼭지 밑에 언제나 커다란 대야 하나가 있다. 매번 물이 절반쯤 차 있고 손잡이가 달린 플라스틱 바가지도 담겨있다.

‘필요할 때 수도꼭지 틀어서 쓰고 잠그면 될 것인데 왜 매번 물을 받아놓으실까?’

아무 생각 없이 구시렁거리기만 했다.

빈 적 없이 늘 물이 채워져 있는 어머니의 물통.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쓰고 잠그는 수도 물은 어머니에게는 야박함의 이면일까 아니면 무엇이든 채워놓아야 한다는 강박일까. 어쩌면 허리 펼 새 없이 일을 해도 늘어나지 않는 살림살이에 대한 갈증과 허기인지도 모른다. 차 있을 때보다 비어 있었던 적이 많았던 가난한 살림. 자식들 배 곯리지 않고 살림 늘려야 한다는 어미의 본능과 아내로서의 조바심에 물통마저 비워 둔다는 것은 게으름이고 삶에 대한 방관이었으리라. 뒤주 속 바가지도 그냥 덩그러니 넣어두지 않고 적당히 기울여 쌀을 반쯤 담아 놓았던 것이, 배고픔에 대한 절박함 뒤에 살림이 불어나기를 바라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이젠 심산 구곡 아니고는 웬만하면 수돗물 콸콸 쏟아진다. 남아도는 쌀은 묵어서 처치 곤란이고 사시사철 과일도 넘쳐 모든 것이 풍요로운 시대다. 하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쌀 한 톨 버리지 못하고 밥그릇에 붙은 밥알을 훑어 입에 넣고 걸레 빤 물도 함부로 엎질러 버리지 못한다.

어머니의 물통엔 언제나 물이 담겨 있다. 어머니 평생의 노고와 주름이 가난한 시절과 섞여 대야의 물로 채워져 있다. 어김없이 이번에도 어머니의 하늘색 대야에는 물이 반쯤 차 있었다. 손빨래하시다 비누 거품이 튀었는지 뿌옇게 흐려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의 물을 선뜻 엎어버리지 못하고 바가지로 떠서 내 세월과 일상을 빨고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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