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경일보 이주옥(수필가)] 내가 좋아하는 어느 작가는 자신의 글 ‘안개’의 첫 문장에 안개는 ’불온하다’고 썼다. 그 한 문장으로 내 주위는 금세 축축해졌고 시야는 희미했다. 헤세는 그의 시(詩) <안개 속>에서 ‘이상하다, 안개 속을 거니는 것은’이라고 했다. 안개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안개라는 단어에서 오는 알 수 없는 미망의 세계는 묘한 호기심과 함께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나는 요즘,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리는 날에도 애써 안개라고 생각하며 그 문장을 떠 올리고는 한다.

안개는 미혹과 불분명함이 본성이다. 그 본성의 뒤에 있는 불온은 드러남에 대한 열망이 깔린 불안과는 조금 다른 의미인 것 같다. 그냥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걷히고 윤곽이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안개는 어쩌면 밝혀짐에서 오는 박탈과 허망에 대한 약간의 미봉책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다녀오던 시골 문상길이 지독한 안개에 쌓였던 적이 있었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깊고 축축한 길을 새벽 2시에 운전했다. 저 멀리 앞선 자동차의 아스라한 후미등을 등대 삼아 가는데 그 차가 이따금씩 깜박여 주는 경고등이 곧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희망처럼 다가왔다.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과 시속 20km를 넘을 수 없는 저속력은 아주 잘 맞는 궁합으로 나를 길 위에서 공포에 떨게 했지만 그 운전자 역시 길 위의 낯선 동행자에게 건네는 불안의 신호였을 것이다. 호흡이 정지된 듯하고 고개 한번 돌릴 수 없었던 그 암담하고 불안한 길이 끝나는 시간에 희붐하게 올라오던 여명은 구원의 빛이었다. 무사하다는 안도는 지나온 그 안개길 마저 환상으로 만들었다.

춘천은 호반의 도시다. 그래서 늘상 안개가 자욱하다고 한다. 호반과 안개. 알 수 없는 낭만과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단어다. 그래서 아직 가보지 않은 그 도시는 언젠가 한번쯤 가고 싶은 곳으로 남겨져 있다. 하지만 안개가 걷힌 도시의 민낯은 상상 밖으로 황량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미리 하면 그 희망 또한 안개처럼 희뿌옇다.

지난 봄 다녀 온 청송에 있는 주산지에도 안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안개는 수몰의 아픔을 휘감고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고목과 실향민이 뿜어내는 한숨 같기도 했다. 무언가 장엄하고 결연한 호흡이 안개로 뿜어져 나오는 듯해 꽤 더운 날이었는데도 한기가 일었다.

공항에도 안개는 치명적이다. 비행기 이착륙 시에 깔린 안개는 더 이상의 낭만이나 단순한 불안이 아닌, 사람의 생명까지 건드릴 수 있는 예민한 자연현상이다. 여행에 대한 설렘은 사라지고 불안한 수런거림과 대처에 분주한 발걸음들이 안개보다 더 어둡고 짙게 깔린다. 어른들은 새벽안개가 자욱하면 한낮은 더울 것이라고 미리 점친다. 그들은 농사에 미치는 영향이나 건강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햇빛을 기다리며 희뿌연 안개를 뚫고 물꼬를 매만지러 새벽 논둑길을 묵묵히 걷는다. 그들에게 안개는 반드시 걷힐 것이라는 진리를 수반하는 잠시의 답답함일 뿐이다.

직권남용과 선거법 위반 등으로 오랜 시간 법정 싸움을 했던 어느 광역단체장이 무죄 선고를 받던 날, 그는 지지자들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안개가 걷히면 모든 실상은 다 드러나는 게 세상 이치’라고 말했다. 진실 뒤에 꽁꽁 숨은 불분명함과 치열하게 싸우고 그래도 불안했던 선고를 기다렸던 사람의 생생한 육성이었다.

사노라면 종종 안개 속을 거니는 것처럼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있다. 도무지 헤어날 기미가 안보일 때도 있다. 불분명함과 불안함은 절망에 이르게도 한다. 떠오르는 햇살에 안개는 환하게 걷히는 것이 자연이치라고는 해도 막상 그 속에 있을 때는 그저 움츠러들고 불안할 뿐이다. 가려져 있는 것들은 알 수 없다는 명제 아래 사람을 수시로 시험하고 한계치를 건드린다. 견디고 겪으라는 시행착오의 시간일 것이다. 분명 안개를 뚫고 나온 하늘은 더없이 맑고 화창 할 테니까. 지금 다소 불온한 시간에 있는 나도 햇살 쨍한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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